투자정보마당
누구에게나 힐링푸드는 있다
다들 소울 푸드 하나씩은 있으시지요? 저 또한 힘들 때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이 있답니다. 오늘은 첫 글이니만큼, 딱딱한 시장 이야기보다 제 마음 속 소울 푸드에 얽힌 스토리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2000년 초 중반, 캠퍼스는 온통 컨설팅사들의 채용설명회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IMF 직후 알만한 기업들의 법정관리, 부도, 정리해고와 같은 우울한 뉴스가 넘쳐났던 시절, 잘 차려 입고 영어를 섞어 쓰는 외국계 컨설턴트들은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요. 연장선상에서 동시대 대학생들의 또 다른 선망의 직업은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였습니다. 비록 펀드매니저는 추후 2016년 영화 ‘부산행’에서 공유의 명연기로 돈만 밝히는 이기적인 직업군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취업문이 좁았던 당시에 자산운용사와 증권사에 입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느덧 펀드매니저가 된 지도 20년이 다 되어가는데요. 신영자산운용이 제 다섯번째 운용사입니다. 흔히 펀드매니저라고 하면 주식 매니저를 떠올리실 텐데, 저는 캐리수익이라 칭하는 채권투자를 담당하는 채권 매니저입니다. 하루에도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 때가 있는 주식 매니저 대비 저희 채권 매니저들은 0.01%를 모아가는 일상이 대부분입니다. 마치 여름철, 하룻밤에도 한 뼘씩 자라나는 잡초를 매일 뽑고 거름 주며 텃밭을 일구는 농사꾼처럼, 하루 하루 성실히 쌓이는 캐리수익이 채권형 펀드 수익률의 밑천을 이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관자금 수익률 경쟁, 크레딧 채권들의 예측불가 이벤트, 금융통화위원회와 FOMC의 기준금리 결정 불확실성 등등 일상은 변수들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매니저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캐리가 쌓이는’ 채권은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채권매니저들의 일상이 방파제 안 바다처럼, 늘 잔파도만 치는 것은 아닙니다. 주식시장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장내 거래가 가능하지만, 증권사 브로커를 통해 1:1 장외매매가 이뤄지는 채권시장은 유의미한 매수, 매도 호가가 형성조차 되지 않는 호가 절벽 사태가 몇 년에 한번씩은 꼭 발생합니다. 가깝게는 2022년 가을, 증권사 랩/신탁 출금 사태에 된서리를 맞아 카드, 캐피탈채 등 크레딧 채권 유동성 경색 사태, 2018년 카타르 은행 예금담보 ABCP 발 대규모 MMF 환매 사태 등이 떠오르구요. 2020년 3월 코로나로 주식, 채권의 발작적 가격급락과 전방위적 펀드 출금, 장외채권시장의 호가 공백, 매수 실종 사태도 있었습니다.
현재의 ‘채권시장안정펀드’가 출범한 계기인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도 아련한 기억으로 떠오르구요. 2010년 초 유럽 재정위기, 2016년 트럼프 당선 후 트럼프 탠트럼 기간처럼 신용경색이 아닌 갑작스런 장기금리 급등으로 채권가격이 급락했던 기간도 있었습니다. 비이성적인 가격 급락은, 채권 매니저 입장에서 철저한 분석을 통해 기존에 수립한 뷰가 맞다는 판단이 든다면 견뎌낼 수 있는 이벤트입니다. 그에 비해 크레딧 채권의 유동성 경색, 호가 공백으로 인한 출금대응 실패는 겪어서는 안되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입니다.

투자자들의 쇄도하는 환매 신청에 대해 100억 단위 거래 위주인 장외시장에서 매도 후 현금화해야 하는데, 지난 위기상황에서는 그 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될 때도 있었습니다. 매니저들 간 우스개소리로 채권 실물, 어음 실물 종이 들고 명동 사채업자라도 찾아 가야겠다 하기도 하는데요. 개별 종목의 신용등급 강등과 같은 이슈라면 가격의 문제일 뿐 현금화는 결국 가능합니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 리스크 발생으로 원화 자산에 대한 전방위적 패닉 셀, 펀드런이 일어날 때 개별 매니저의 대응 여지는 장외시장의 특성 상 지극히 제한되고, 안간힘을 써도 매매 1건 체결마저 쉽지 않는 상황에 대해 무력함을 느끼게도 됩니다.
긴 직장생활 내내 채권 매니저의 고뇌와 직장인의 고충이 반복됐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매일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무감각하게 기계적으로 직면했던 내 포트폴리오의 숫자들이 갑자기 투자자들의 면면으로 다가올 때였습니다. 매니저의 일상은 출근해서 펀드의 수익률과 설정/해지금액을 확인하고 장중 변화하는 가격에 대응하며 숫자와 함께 하는 날의 반복입니다. 밖에서 보면 일견 평온한 일상은 저 무감정의 숫자들이 한 분 한 분의 투자자로 바뀔 때 균열이 생기고 맙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를 겪었던 대리 시절, 시장 전체가 쇄도하는 출금 요청으로 크레딧 채권들의 매도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결국 고지한 특정 기간만큼 환매가 불가능한 ‘환매중지’ 의사결정이 이뤄졌습니다. 쇄도하는 항의와 판매사와의 업무전화에 응대하는 한편, 하루 종일 잡히지 않는 매수호가를 찾아다니다 기진맥진 해서 퇴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회사로 한 투자자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짐작하시듯 형식은 내용증명이었죠. 알뜰살뜰 살림하며 종자돈을 모으게 된 과정, 펀드에 투자해 소소하게 수익이 나면 시도하고자 했던 위시리스트, ‘환매중단’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셨을 그 분이 환매중단 통지에서 받은 충격과 앞으로의 걱정들이 비 금융인의 용어로 꾹꾹 눌러 적혀 있었습니다. 개별 종목의 부도가 아닌 단기적 유동성 경색에 따른 환매중단은 시장의 극단적 공포가 해소되면 정상적인 가격을 회복하고 환매를 재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에도 힘든 시기를 거쳐 자산 매각과 만기상환을 통해 결국 마무리됐었습니다.
다만 민원인의 손편지를 읽고 나서, 그간 기계적으로 처리했던 수많은 숫자들이 하나 하나의 사연과, 제가 지어야 할 책임의 무게로 다가왔던 순간의 감정은 잊을 수 없습니다. 투자자산운용사 시험 공부 과정에서 그저 외웠던 ‘신의 성실의 원칙’에 대해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체력도 멘탈도 소진돼 가던 그 때, 그 편지 한통으로 너덜너덜 해진 마음을 겨우 다잡고, 갑자기 느껴진 허기에 혼자 찾아갔던 식당이 여의도 SK 트레뉴 1층의 순대국집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소진돼 버린 당시의 저를 위로해줬던 뜨거운 순대국 한 그릇!

같은 시황을 견뎌내고 있는 동료 매니저들과의 소소한 대화조차 버거운 시기, 홀로 대면한 순대국 한 사발은 그야말로 영혼부터 발끝까지 채워 주는 소울푸드였습니다. 요즘이야 직장인들로 붐비는 여의도 점심시간에도 혼밥족들이 많아졌지만, 20대 아가씨였던 그 시절, 혼밥은 참 어색했었지요. 하지만 그 뒤로도 크고 작은 고비마다 소소한 힐링캠프를 찾아 순대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신송빌딩 지하의 백암왕순대, SK 트레뉴의 왕왕순대국밥 등 다 지난 시절의 고민과 방황의 기억이 함께 하는 추억의 장소입니다.
지금도 여의도에는 많은 순대국집이 있는데요, 대체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식당마다 다른 구성, 즉, 국과 밥을 따로 주는지, 말아 주는 국밥인지의 여부, 반찬은 석박지인지 무생채인지 배추김치인지, 순대국의 주인공은 순대인지, 기타 부속고기인지 등등 각각의 개성이 강해 고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제가 가고 있는 곳은 비밀이니, 혹시 혼자 ‘고독한 중년의 맛’을 느끼고 있는 저를 보더라도 모르는 척 지나쳐 주세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투자는 즐거운 것이구요, 지칠 때면 순대국 한 그릇 하며 지친 나를 다독거려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마라톤과 같은 여정입니다. 그 길에 저희 신영자산운용 채권운용본부가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신영자산운용 준법감시인 심사필 25-다-618